바둑의 시작을 묻는 질문에는 늘 두 갈래의 답이 따라옵니다. 하나는 요·순 임금 같은 성왕(聖王) 전설, 하늘의 별자리와 우주관, 전장을 축소한 전략 비유처럼 “의미가 먼저 붙은 이야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대 중국의 문헌 기록과 출토 유물처럼 “근거가 남은 흔적”입니다. 둘 다 알아보도록 하죠.

전설과 신화로 전해진 바둑의 시작
바둑의 기원을 다룰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언제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사실의 목록이 아니라, “왜 이런 놀이가 생겨야 했는가”를 설명하는 이야기들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중요한 문화는 종종 신화적 서사를 통해 권위와 의미를 얻었고, 바둑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요·순 임금 전설처럼 교화와 통치의 도구로 설명되기도 하고, 천문·우주관의 상징으로 바둑판의 구조를 해석하기도 하며, 전쟁의 축소판이라는 전략 비유로 바둑을 재정의하기도 합니다. 이런 기원 담론은 실제 발명 시점을 증명하기보다는, 바둑이 어떤 가치와 기능을 대표하는지 사회적으로 합의해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요·순 임금 전설과 ‘교화의 도구’로서의 바둑
요·순 임금이 바둑을 만들거나 바둑을 활용했다는 전설은 “놀이”를 “교육”으로 격상시키는 서사 구조를 갖습니다. 바둑이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군주가 백성과 자식을 교화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었다는 설정은 이 게임에 도덕적 무게를 부여합니다. 핵심은 바둑이 즐거움을 넘어 절제, 판단, 인내 같은 덕목을 훈련하는 장치로 제시된다는 점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발명 서사
전설 속 바둑은 대개 현실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합니다. 예컨대 산만하거나 성정이 거친 인물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상황이 먼저 제시되고, 말로 타이르거나 벌을 주는 방식으로는 효과가 없으니 새로운 교육 도구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바둑은 ‘집중’을 강제하면서도 폭력적이지 않은 훈육 장치로 자리합니다. 승부가 있지만 살육이 없고, 경쟁이 있지만 파괴가 없는 구조가 “통치와 교육에 적합한 게임”이라는 결론을 뒷받침합니다.
덕과 절제를 가르치는 놀이라는 해석
이 전설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바둑의 플레이 경험이 실제로 덕목 훈련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한 수를 두기 전 멈추어 생각해야 하고, 실수는 즉시 형태로 드러나며, 과욕은 빈틈을 만들고, 조급함은 돌의 생사를 흔듭니다. 전설은 이런 특성을 도덕 언어로 번역해 “바둑을 두는 행위 자체가 절제와 수양”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합니다. 결과적으로 바둑은 이기는 기술 이전에, 자기 통제와 판단의 훈련이라는 의미를 얻게 됩니다.
전설이 후대에 권위를 부여한 방식
요·순 임금 서사의 가장 큰 기능은 바둑의 사회적 지위를 끌어올리는 데 있습니다. “성왕이 선택한 교화 도구”라는 틀은 바둑을 궁중과 상층 문화로 정당화하고, 후대 지식인들이 바둑을 ‘품격 있는 취미’로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동시에 이런 기원 서사는 바둑을 두는 행위를 단순 오락으로 폄하하려는 시선에 대응하는 논리로도 작동합니다. 즉, 전설은 바둑이 ‘놀음’으로만 소비되는 것을 막고 ‘수양’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문화적 장치였습니다.
천문·우주관과 바둑판의 상징성
바둑판을 우주 구조의 축소판으로 보는 해석은 바둑을 더욱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영역으로 확장합니다. 이 관점에서 바둑판은 단지 승부의 무대가 아니라, 하늘과 땅, 질서와 변화, 음과 양이 상호작용하는 ‘모형’이 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해석이 바둑의 기원을 과학적으로 밝히기보다, 바둑을 세계관의 언어로 설명함으로써 문화적 위상을 강화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늘의 별자리와 점(星) 해석
바둑판의 교차점은 ‘점’으로 읽히기 쉽고, 점을 별에 비유하면 바둑판은 곧 하늘의 지도처럼 보입니다. 이런 상징 읽기는 “바둑은 작은 판 위에 우주의 질서를 담는다”는 식의 서사를 가능하게 합니다. 돌을 놓는 행위는 단순한 착점이 아니라, 하늘의 별이 자리 잡듯 질서를 세우는 행위로 해석됩니다. 이때 승부는 단지 득실 계산이 아니라, 질서의 균형을 잡는 과정으로 격상됩니다.
19×19 격자의 의미가 덧씌워진 과정
오늘날의 표준인 19×19가 처음부터 고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이해되곤 하지만, 상징 해석은 대개 ‘표준이 굳어진 뒤’에 더 강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규격이 안정되면 사람들은 그 구조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고, 숫자와 형태는 세계관적 상징의 재료가 됩니다. 19×19라는 체계는 충분히 복잡하면서도 반복 가능한 질서를 제공하기 때문에, 우주관이나 철학적 해석이 붙기 좋은 틀이 됩니다. 즉, 19×19의 상징성은 발명의 근거라기보다, 표준화된 형태에 후대가 부여한 해석의 층위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흑·백의 대비가 만든 철학적 독해
흑과 백의 대비는 바둑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상징 자원입니다. 이분법의 단순함 덕분에 음양, 상반과 조화, 긴장과 균형 같은 철학 언어가 쉽게 결합합니다. 그러나 바둑의 흑백은 선악처럼 고정된 가치 판단을 뜻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힘이 균형을 겨루며 판 전체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보여줍니다. 이 관점에서 바둑은 “대립이 파괴가 아니라 공존의 질서를 만든다”는 메시지로 읽히며, 단순 승부를 넘어 사유의 도구로 자리하게 됩니다.
군사·전략 비유로서의 기원 담론
바둑을 전쟁에 비유하는 관점은 바둑의 가장 직관적인 이미지 중 하나를 형성했습니다. 포위, 차단, 연결, 희생 같은 요소가 분명하기 때문에 바둑은 전략 훈련의 은유로 자주 사용됩니다. 기원 담론에서 군사 비유가 반복되는 이유는 바둑을 “머리로 싸우는 전쟁”으로 묘사함으로써, 이 게임을 지적 훈련의 영역으로 위치시키기 좋기 때문입니다.
전장(戰場)을 축소한 모형이라는 관점
바둑판을 전장으로 보는 순간, 돌은 병력이 되고, 집은 점령지가 되며, 두터움은 방어진지가 됩니다. 이 비유는 바둑의 공간적 성격을 잘 드러냅니다. 체스처럼 정해진 말의 역할을 따르기보다, 바둑은 빈 공간을 어떻게 점유하고 형세를 어떻게 조직하는지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토의 형성’과 ‘전선의 이동’이라는 전쟁 은유가 자연스럽게 붙습니다. 바둑이 단순한 퍼즐이 아니라, 변화하는 전황 속에서 장기 계획과 국지 전투를 동시에 운영하는 게임이라는 인식이 여기서 강화됩니다.
포위·연결 개념이 상징으로 굳어진 배경
바둑의 핵심 원리 중 하나는 고립된 돌은 약해지고, 연결된 돌은 강해진다는 점입니다. 이 구조는 인간 사회와 군사 조직의 원리와도 쉽게 겹쳐집니다. 그래서 연결은 연대와 협력을, 포위는 고립과 압박을 상징하는 언어로 확장됩니다. 후대의 해석은 이런 개념을 단지 기술 용어로 두지 않고, 조직 운영과 정치, 인간관계에까지 적용되는 ‘비유의 창고’로 만들어 왔습니다.
신화가 ‘전략 게임’ 이미지를 강화한 경로
전설과 군사 비유는 서로를 강화합니다. 바둑을 성왕이 교화에 썼다는 서사는 바둑을 ‘정치적 도구’로 올려놓고, 전장 비유는 그 도구성이 지적·전략적 능력과 연결된다는 점을 설득합니다. 그 결과 바둑은 “시간을 보내는 놀이”가 아니라 “지략을 연마하는 문화”라는 이미지로 굳어집니다. 이 이미지는 이후 바둑이 귀족과 사대부의 취미로 자리 잡는 데에도 유리하게 작용하며, 바둑을 둘러싼 품격의 서사를 지속적으로 생산해내는 기반이 됩니다.
고대 중국에서의 형성: 문헌과 유물
바둑이 “어디서 시작됐는가”를 문헌과 유물로 좁혀 들어가면, 전설처럼 단일한 창시 순간이 보이기보다는 ‘점진적 정착’의 흔적이 더 또렷해집니다. 초기 기록은 바둑을 오늘날과 같은 완결된 규칙 체계로 설명하지 않고, 당시 사람들이 즐기던 여러 판 놀이 가운데 하나로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유물은 실물의 존재를 보여주지만, 격자 수와 용도가 완전히 표준화되기 전이라 해석의 여지가 큽니다. 결국 고대 중국에서의 바둑 형성은 “기록의 언어가 점차 구체화되고, 실물의 형태가 점차 정리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가장 이른 문헌 기록의 층위
문헌은 ‘바둑이 있었다’는 사실보다, 바둑이 어떤 맥락에서 언급됐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초기 텍스트가 반드시 바둑만을 지칭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같은 글자라도 시대에 따라 의미 범위가 달랐고, 후대 주석이 그 빈틈을 채우면서 “기원 서사”가 두터워졌습니다.
고전 문헌에서의 명칭과 용례
초기 문헌에서는 바둑이 오늘날처럼 곧바로 ‘바둑’이라는 고유한 이름으로 등장하기보다, 판 놀이를 포괄하는 표현이나 보다 넓은 범주의 단어로 언급되는 일이 잦습니다. 특히 ‘겨룬다’는 의미를 갖는 고전적 표현이 판 위의 승부를 가리키면서, 시간이 흐르며 특정 게임(바둑)으로 의미가 수렴하는 흐름이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가장 오래된 기록은 “바둑의 상세한 규칙”을 남겼다기보다 “당대에 판을 두고 겨루는 문화가 있었다”는 층위를 먼저 보여줍니다.
또한 고전 문헌의 용례는 바둑이 독립된 스포츠·게임이라기보다, 대화 속 비유나 논증의 재료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바둑이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미 그 구조를 이해하고 있어야 성립하는 비유로 기능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비유로 쓰였다는 사실 자체가 곧 “인지 가능한 문화 요소로 자리 잡았다”는 방증이 됩니다.
놀이인가, 수양인가: 기록의 관점 차이
같은 바둑을 두고도 문헌의 시선은 엇갈립니다. 어떤 기록에서는 바둑을 ‘한가함을 달래는 놀이’로 언급하며 시간 낭비의 위험을 경고하고, 다른 기록에서는 집중력·판단력·절제 같은 덕목을 드러내는 행위로 해석합니다. 이 차이는 바둑 자체의 성격이 변했다기보다, 바둑을 바라보는 사회적 프레임이 다층적이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특히 유교적 질서가 강해질수록 “유익한 여가”와 “방종한 오락”을 구분하려는 규범적 언어가 강화됩니다. 바둑은 그 경계선 위에서 자주 호출됩니다. 수양의 도구로 옹호되기도 하고, 과몰입과 도박의 위험을 들어 경계의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즉, 문헌의 상반된 평가 자체가 바둑이 넓게 퍼졌고, 그만큼 사회적 영향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후대 주석이 기원 서사를 확장한 방식
초기 텍스트가 간단히 남긴 단서들은 후대의 주석·해설을 만나면서 “구체적인 이야기”로 재구성됩니다. 바둑이 언급된 한 줄의 표현이 “누가 만들었는가”, “무슨 뜻을 담았는가” 같은 질문과 결합하면서, 전설적 기원(성왕·현인·명장과의 연결)이나 우주론적 상징(천문·음양)으로 확장되는 식입니다.
이 과정에서 주석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첫째, 용어의 의미를 특정해 ‘이 말이 바둑을 가리킨다’는 해석을 강화합니다. 둘째, 그 바둑을 가치 있는 행위로 만드는 서사를 덧붙입니다. 결과적으로 “기원에 대한 확신”은 발굴된 증거가 늘어서 생기기보다는, 해석과 권위의 축적을 통해 강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원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시대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출토 유물로 보는 초기 바둑의 흔적
유물은 문자와 달리 ‘실물’이라는 강점을 갖지만, 해석의 난점도 분명합니다. 초기에는 판 놀이가 다양했고, 바둑판과 유사한 격자·도구가 다른 게임과 겹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출토 유물은 “바둑이 물리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지만, 곧장 오늘날의 규칙·규격과 동일시하기보다는 ‘형태의 변천’을 전제로 읽어야 합니다.
초기 판(盤) 형태와 격자 수의 다양성
초기 바둑판으로 추정되는 유물은 재질과 제작 방식이 다양합니다. 목재, 석재, 칠기 표면 등 다양한 기반 위에 선을 그어 격자를 만든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고, 별도의 판이 아니라 생활용 기물의 윗면을 가공해 판으로 활용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이런 다양성은 ‘전용 바둑판’이 널리 보급되기 전에는, 상황과 계층에 따라 판의 형태가 유동적이었을 수 있음을 뜻합니다.
격자 수 역시 표준화 이전에는 여러 형태가 공존했을 가능성이 거론됩니다. 유물이 파손되거나 일부만 남아 전체 격자를 확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다른 게임의 판과 혼동될 여지도 있습니다. 따라서 초기의 격자 다양성은 “19×19로 곧장 이어지는 직선적 발전”이라기보다, 여러 격자 체계가 존재하다가 점차 한 규격으로 수렴해가는 전환기의 풍경으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돌(碁石)의 재료와 제작 기술
초기 돌은 재료부터 표준이 아니었습니다. 강돌을 다듬거나, 돌·도기·뼈·조개껍데기 같은 다양한 소재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지역의 자원과 제작 기술에 따라 형태가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후대로 갈수록 바둑돌은 휴대와 착점의 안정성을 고려한 형태로 정리되며, 표면 가공과 연마 수준도 높아집니다. 이 변화는 바둑이 단순한 즉흥 놀이에서 “정교한 기물 문화를 갖춘 취미”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지표가 됩니다.
제작 기술의 발전은 곧 계층성과도 연결됩니다. 대량 생산이 어렵고 가공이 정교할수록 비용이 올라가며, 이는 곧 상층의 취미로서 바둑이 자리 잡는 데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동시에 단순 재료의 돌이 함께 발견되는 경우라면, 바둑이 특정 계층에만 갇히지 않고 더 넓은 생활 영역으로 확산되었을 가능성도 시사합니다.
유물의 연대 해석에서의 쟁점
유물 해석의 핵심 쟁점은 “그게 정말 바둑인가”와 “그게 어느 시기의 바둑인가”입니다. 무덤 부장품으로 나온 판이 실제로는 다른 게임(예: 다른 격자 놀이)의 판일 수 있고, 돌로 보이는 것이 바둑돌이 아니라 장식물·계량용 도구·다른 놀이의 말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판과 돌이 함께, 그리고 바둑의 맥락을 뒷받침할 추가 단서와 함께 출토되지 않으면 해석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연대 역시 출토층의 정보만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재사용·전승·가보(家寶)처럼 오래된 물건이 후대에 매장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반대로 후대의 교란으로 층위가 섞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유물은 “단일 증거로 기원을 확정”하기보다, 여러 사례를 누적해 확률적으로 ‘형성 시기’를 좁혀가는 방식으로 읽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기 바둑의 사회적 위치
문헌과 유물을 종합하면, 초기 바둑은 ‘대중 오락’ 하나로 환원되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습니다. 상층의 교양과 수양 도구로 격상되면서도, 동시에 오락·승부·내기라는 요소를 동반해 규범의 경계에 서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중성은 바둑이 오래 살아남는 힘이 되었고, 후대에 더 강한 제도화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귀족 문화와 사대부 취미로서의 정착
바둑이 상층 문화로 자리 잡는 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작동합니다. 첫째, 시간을 ‘여가’로 쓸 수 있는 계층이 존재해야 하고, 둘째, 그 여가가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둑은 복잡한 판세 판단과 긴 호흡의 운영을 요구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층의 여가와 결합하기 좋았습니다. 동시에 “지적 훈련”이라는 설명이 붙기 쉬워, 취미를 교양의 언어로 바꿔 주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사대부 문화에서 바둑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관계와 담론을 만드는 장이기도 했습니다. 바둑을 둘 줄 아는 능력은 교양의 표지로 작동할 수 있었고, 바둑판 앞의 예절과 대화 방식은 ‘품격 있는 여가’라는 이미지를 강화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둑은 상층의 취미로 오래 정착할 토대를 갖추게 됩니다.
교육·수양 도구로서의 기능
바둑이 교육 도구로 해석되는 지점은 매우 실용적입니다. 바둑은 단기 이익과 장기 형세를 함께 고려하도록 만들고, 무리한 공격이 오히려 손해가 될 수 있음을 반복해서 체험하게 합니다. 또한 상대의 의도를 읽고, 자신의 약점을 관리하며, 불리한 국면에서도 최선의 선택을 찾는 훈련을 제공합니다. 이런 특성은 도덕적 수양이라는 언어로 번역되기 쉬웠고, 바둑을 ‘가르칠 만한 놀이’로 만들었습니다.
더 나아가 바둑은 심리 훈련의 성격도 띱니다. 조급함, 과욕, 방심 같은 내적 흔들림이 곧바로 판 위의 결과로 연결되기 때문에, 자기 통제의 필요성이 구조적으로 내장돼 있습니다. 따라서 바둑을 수양 도구로 보는 관점은 단순한 미화가 아니라, 플레이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해석이기도 합니다.
도박·오락과의 경계가 기록된 사례
바둑이 오랫동안 사랑받은 이유 중 하나는 승부가 주는 쾌감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승부의 쾌감은 내기와 쉽게 결합합니다. 그래서 일부 기록에서는 바둑을 “과도한 몰입을 부르는 놀이”로 경계하거나, 도박적 소비와 연결될 위험을 지적하는 흐름이 나타납니다. 이는 바둑이 사회적으로 확산될수록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현상입니다.
이 경계의 기록은 바둑의 지위를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둑의 사회적 존재감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규범이 경계할 정도면 이미 널리 행해졌다는 뜻이고, 경계가 반복될수록 바둑은 ‘통제해야 할 영향력’을 가진 문화가 됩니다. 결국 바둑은 교양과 오락 사이에서 끊임없이 재정의되며, 그 긴장 속에서 제도화와 표준화로 나아갈 조건을 축적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규칙과 판의 표준화: ‘바둑’이 되기까지
바둑이 오랜 시간 사랑받아 온 이유는 단지 “재미있는 놀이”여서가 아니라, 누구나 같은 규칙 아래에서 실력을 겨룰 수 있는 ‘공통 언어’로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공통 언어는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격자 크기와 판의 규격이 여러 형태로 공존하던 시기가 있었고, 승패를 가르는 기준 역시 지역과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습니다. 결국 바둑이 오늘날의 바둑이 되었다는 것은, 판의 크기·돌의 쓰임·승패의 계산 방식·용어와 기록법이 서로 맞물리며 표준 체계로 정리되었다는 뜻입니다.
격자 크기와 판 규격의 변천
판의 격자는 바둑의 “가능한 세계”를 결정합니다. 격자가 작으면 전투가 빨라지고, 격자가 커지면 세력과 형세, 장기 운영이 중심이 됩니다. 따라서 표준화의 과정은 단순히 크기를 통일한 일이 아니라, 바둑이 어떤 성격의 게임으로 정체성을 갖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변화였습니다.
다양한 격자에서 19×19로 수렴한 흐름
초기에는 여러 격자 체계가 혼재했을 가능성이 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일정한 규격으로 수렴해가는 흐름이 나타납니다. 19×19는 “충분히 넓어 전략적 선택지가 폭발하면서도, 한 판을 인간의 집중력과 시간 안에서 운영 가능하다”는 균형점에 가깝습니다. 공간이 넓어질수록 단기 전투만으로 승부가 결정되지 않고, 전선의 확장·세력권의 분배·중앙과 변의 균형 같은 장기 전략이 중요해집니다. 이 변화는 바둑을 단순한 국지 게임이 아니라, 판 전체를 설계하는 고차원 게임으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또한 19×19의 안정은 문화적 효과를 동반합니다. 규격이 고정되면 교육과 전승이 쉬워지고, 강자들의 대국이 비교 가능한 ‘기준’으로 축적됩니다. 즉 19×19로의 수렴은 한 규격의 승리라기보다, 바둑이 하나의 통일된 경쟁·학습 체계를 갖추는 전제 조건이 됩니다.
9×9·13×13의 초기적 역할
작은 판은 “바둑의 축소판” 역할을 합니다. 초심자에게 19×19는 선택지가 너무 많아 학습이 느려질 수 있는데, 9×9나 13×13은 전투의 핵심 원리를 짧은 시간에 반복 학습하게 해줍니다. 활로 계산, 연결과 절단, 단수와 패의 기본 형태가 작은 판에서 더 자주, 더 빠르게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격 덕분에 작은 격자는 바둑이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교육적 장치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 다른 역할은 실험과 변주의 장입니다. 표준이 완전히 고정되기 전에는 다양한 판 크기에서 룰의 감각이 다듬어질 수 있고, 이후 표준이 확립된 뒤에도 작은 판은 훈련용·흥행용·시간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 대안 규격으로 유지됩니다. 즉 9×9·13×13은 ‘본류 이전의 임시 규격’이라기보다, 표준 바둑을 떠받치는 교육·실전 보조 체계로 의미를 갖습니다.
표준화가 확산에 미친 영향
표준화는 단순히 통일성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바둑의 확산 속도를 바꿉니다. 규격과 규칙이 정리되면 같은 판을 두고도 지역별 해석 차이가 줄어들고, 강자·약자가 서로 다른 곳에서 만나도 동일한 기준으로 승부가 가능합니다. 이는 곧 교류의 증가로 이어지고, 교류는 다시 실력 체계와 이론 체계를 발전시킵니다.
또한 표준화는 “기물 산업”과도 맞물립니다. 판과 돌의 제작 규격이 정해지면 생산·유통이 쉬워지고, 기물의 품질이 일정해지며, 대국 문화가 안정적으로 유지됩니다. 결과적으로 표준화는 바둑을 개인적 놀이에서 사회적 경쟁·교육·기록의 대상으로 확장시키는 촉매였습니다.
승패 규칙의 형성 과정
판의 크기가 안정되더라도, 승부를 어떻게 계산하느냐가 통일되지 않으면 게임은 ‘같은 게임’이 되기 어렵습니다. 승패 규칙의 정착은 바둑을 체계화하는 두 번째 축입니다. 특히 바둑은 “상대를 모두 잡아 없애는 게임”이 아니라, 공간을 조직하고 생사를 판정해 ‘집’을 확정하는 게임이기 때문에, 집의 개념과 생사 판정의 공통 기준이 필수적입니다.
집(地) 개념의 정착과 계량화
집의 개념이 정착되면 바둑은 “형세를 만든다”는 추상적 설명에서 “점수로 비교한다”는 계량적 게임으로 이동합니다. 즉, 어느 지역이 누구의 영역인지 합의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영역을 어떤 방식으로 합산할지도 정해야 합니다. 이 계량화는 바둑을 경쟁 게임으로 안정시키는 결정적 조건입니다. 승부가 명확해야 대국이 축적되고, 축적된 대국은 다시 전략 이론의 발전을 촉진합니다.
집 개념이 정착되는 과정에서는 ‘끝내기’의 중요성이 커집니다. 영역이 점수로 환산되는 순간, 마지막 한 집의 가치가 분명해지고, 작은 이득을 쌓는 기술이 체계화됩니다. 이때부터 바둑은 단순히 싸움을 잘하는 게임이 아니라, 형세 판단과 미세한 이득의 최적화를 요구하는 게임으로 진화합니다.
사석·활로 개념이 체계화된 배경
집을 계산하려면 생사를 판정할 수 있어야 하고, 생사를 판정하려면 활로와 포위의 규칙이 명확해야 합니다. 활로는 바둑에서 가장 직관적인 생존 조건이지만, 실제 대국에서는 ‘눈’, ‘패’, ‘빅’처럼 단순 활로 계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형태가 등장합니다. 이 복잡성을 정리하는 과정이 곧 규칙 체계화의 역사입니다.
사석 개념의 정착도 중요합니다. 어떤 돌이 살아남았고 어떤 돌이 죽었는지, 그 판정이 점수에 어떻게 반영되는지까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사석이 명확히 정의되면, 공격은 “잡는 것”을 넘어 “살 수 없는 형태로 몰아넣는 것”으로 정교해집니다. 결과적으로 활로·사석의 체계화는 바둑을 ‘형태와 논리’가 결합된 게임으로 만들었고, 후대의 정석·사활·행마 이론이 발전할 기반이 됩니다.
지역·시대별 규칙 차이가 남긴 흔적
바둑 규칙은 큰 틀에서 같아 보여도, 세부 조항에서는 지역·시대별 차이가 남아 왔습니다. 예컨대 집을 세는 방식, 사석 처리 방식, 패 관련 규정, 덤(선후 보정) 같은 요소는 전통과 운영 방식에 따라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어느 쪽이 “맞다/틀리다”라기보다, 동일한 핵심 원리를 서로 다른 관습으로 정리한 결과로 보는 편이 합리적입니다.
중요한 점은 규칙 차이가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바둑이 넓게 전파되었고, 다양한 공동체가 자기 방식으로 운영해 왔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류가 늘수록, 혹은 공식 대국과 제도가 강해질수록, 이런 차이를 조정하고 통합하려는 압력이 커지면서 표준 규칙의 권위가 강화됩니다.
명칭의 변화와 개념의 고정
판과 규칙이 정리되어도, 사람들이 그 게임을 무엇이라 부르고 어떤 개념으로 이해하는지가 안정되지 않으면 전승은 느슨해집니다. 이름과 용어는 규칙의 ‘설명서’이자 ‘학습 언어’입니다. 바둑이 바둑이 되는 마지막 단계는, 명칭과 용어가 고정되며 지식이 축적 가능한 구조로 바뀌는 과정입니다.
‘기(碁)’와 ‘바둑’ 명칭의 역사적 맥락
동아시아에서 바둑은 오랫동안 한자 문화권의 공통 명칭으로 불렸고, 각 지역 언어로 토착화되면서 고유 명칭이 자리 잡습니다. 여기서 명칭의 변화는 단순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해당 사회가 바둑을 자기 문화 안에 ‘자연스럽게 편입’했다는 신호입니다. 이름이 정착되면 구전이 쉬워지고, 교육과 기록에서 반복되며, 결국 바둑은 외래 요소가 아니라 일상적 문화 요소가 됩니다.
또한 명칭은 바둑을 바라보는 관점을 반영합니다. 어떤 이름은 게임 자체를 가리키고, 어떤 이름은 두는 행위나 기물(판·돌) 중심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런 차이는 바둑이 제도·취미·놀이 중 무엇으로 강하게 인식되었는지의 단서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용어(활로, 집, 패 등)가 만들어낸 규칙 이해
용어가 정리되면 규칙은 ‘암묵지’에서 ‘명시지’로 이동합니다. 예를 들어 활로, 집, 패 같은 단어는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바둑의 핵심 메커니즘을 압축한 개념 장치입니다. 활로라는 단어가 생존 조건을 즉시 떠올리게 하고, 집이라는 단어가 승부의 기준을 확정하며, 패라는 단어가 반복 금지와 국면 전환의 논리를 설명합니다.
이처럼 용어가 체계화되면 학습 속도가 빨라지고, 강자의 감각이 언어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용어는 분쟁을 줄입니다. 규칙 적용이 애매할 때, 공통 용어는 “우리가 같은 현상을 같은 말로 부른다”는 합의를 제공해 판단의 기준점을 만들어 줍니다.
기록 방식(기보)의 등장과 전승 구조
표준화의 완성에 가장 크게 기여한 요소 중 하나가 기보입니다. 기보는 한 판의 과정을 ‘다시 재현’할 수 있게 만드는 기술이며, 바둑 지식이 누적되는 통로입니다. 기보가 등장하면 바둑은 순간의 승부를 넘어, 연구·교육·비평의 대상이 됩니다. 누가 어떻게 두었는지, 어떤 수가 왜 나빴는지, 같은 형태에서 어떤 변화를 선택했는지 같은 분석이 가능해집니다.
또한 기보는 지역을 넘어 전승을 가능하게 합니다. 직접 대국을 보지 못해도 기록만으로 학습이 가능해지고, 특정 강자의 스타일과 판단 기준이 후대에 전해집니다. 이때부터 바둑은 ‘개인이 즐기는 놀이’에서 ‘축적되는 지식 체계’로 성격이 바뀝니다. 판의 규격과 규칙, 용어와 기보가 함께 안정되면서 비로소 바둑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 동일한 게임으로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됩니다.
동아시아로의 전파: 한반도와 일본에서의 정착
바둑이 동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간 과정은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각 지역의 정치·문화·제도 속에서 다시 해석되고 재구성되는 ‘정착’의 역사였습니다. 핵심 규칙과 원리는 공유되었지만, 바둑을 누구의 놀이로 받아들였는지, 어떤 제도와 기록으로 남겼는지에 따라 바둑의 이미지와 권위는 달라졌습니다. 한반도에서는 궁중과 사대부 문화 안에서 교양·수양의 언어로 편입되는 흐름이 두드러지고, 일본에서는 가문·기관 중심의 제도화가 바둑을 전문 영역으로 끌어올리며 “기원”에 대한 서사까지 재편하는 계기가 됩니다. 전파의 역사는 결국, 같은 게임이 서로 다른 사회적 장치와 만나면서 어떻게 변주되고 강화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한반도로의 유입과 토착화
한반도로의 바둑 유입은 대개 중국과의 교류라는 큰 흐름 속에서 이해됩니다. 다만 “언제부터 바둑이 들어왔는가”를 단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초기에는 기록이 간접적이고 산발적인 경우가 많으며, 바둑이라는 명칭이나 기물에 대한 언급이 곧바로 오늘날의 바둑과 동일한 체계를 의미하는지 해석이 필요한 경우도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한반도에서 바둑이 단순한 유행을 넘어 문화 요소로 자리 잡았다는 점은, 궁중과 사대부의 생활 문화, 취미의 위계, 교육과 수양의 관념과 결합하며 점차 분명해집니다.
전래 시기 설과 근거가 되는 기록들
전래 시기에 대한 설은 보통 “교류가 활발했던 시기”와 “기록이 남기 시작한 시기”를 기준으로 제기됩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바둑이 들어온 시점과, 바둑이 기록될 정도로 사회적으로 의미를 획득한 시점은 다를 수 있습니다. 초기에는 놀이가 존재해도 문헌에 남지 않는 경우가 흔했고, 반대로 후대 기록이 과거를 소급해 정리하면서 전래 시기가 앞당겨져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전래 시기를 논할 때는 ‘단일 연도’보다 “교류의 축이 형성되며 바둑이 상층 문화로 편입되는 구간”을 보는 편이 설득력이 큽니다. 무역·사절·유학·서적과 기물의 이동이 반복되면서, 바둑은 특정 계층의 문화 취향으로 스며들고 이후 서서히 넓어지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궁중·사대부 문화 속 수용 양상
한반도에서 바둑이 정착하는 중요한 무대는 궁중과 사대부 사회였습니다. 바둑은 긴 호흡의 사고, 절제, 판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품격 있는 여가’로 포장되기 쉬웠고, 그 특성은 교양·수양의 언어와 잘 맞았습니다. 궁중에서는 오락이면서도 지나치게 방종해 보이지 않는 놀이가 필요했고, 사대부 사회에서는 취미가 곧 교양의 표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환경에서 바둑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대화와 교류의 장이자 정신 수양의 상징으로 기능합니다.
또한 바둑은 실력을 통해 위계를 만들 수 있는 취미입니다. 글이나 음악처럼 반복 학습과 실전 경험이 필요하고, 고수의 대국이 ‘본보기’로 공유되기 때문에, 사대부 문화의 경쟁·평판 구조와도 자연스럽게 맞물립니다. 이런 구조는 바둑을 안정적으로 전승시키는 기반이 되었고, 바둑이 ‘오래가는 취미’로 자리 잡는 데 기여합니다.
지역적 놀이 전통과의 결합 가능성
전파된 문화가 정착하려면 기존 생활문화와 접점이 생겨야 합니다. 바둑 역시 전혀 새로운 외래 요소로만 남지 않고, 지역의 놀이 감각과 만나며 토착화될 여지가 있습니다. 예컨대 판을 두고 승부를 겨루는 방식, 내기나 친목의 장으로 기능하는 방식, 특정 공간(사랑방·정자·서재 등)에서 즐기는 방식은 각 지역의 생활양식에 맞게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바둑 자체의 규칙’이 크게 변한다기보다, 바둑이 놓이는 사회적 맥락이 달라집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교양의 상징으로 더 강하게 자리 잡고, 어떤 환경에서는 친목과 오락의 요소가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이후 바둑을 바라보는 평가(수양 vs. 유희)에도 영향을 주며, 바둑이 사회적 경계선 위에서 다양한 의미를 획득하게 만듭니다.
일본 전래와 제도화로 인한 ‘기원’ 재해석
일본에서의 바둑 정착은 “제도화”라는 특징을 통해 다른 양상을 드러냅니다. 바둑이 들어온 이후, 단순한 유입을 넘어 가문·기관 중심의 체계가 강해지면서 바둑은 전문 영역으로 발전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바둑을 ‘배워서 즐기는 취미’뿐 아니라 ‘공적으로 관리되는 기술과 직업’의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렸고, 그 결과 바둑의 권위와 기원 서사도 제도에 맞게 재해석되는 경향이 생깁니다.
전래 경로와 초기 수용층
일본으로의 전래는 대체로 대륙 문화의 유입 경로와 결합해 설명됩니다. 초기 수용층은 주로 상층 계층과 지식인·승려 집단처럼 문물 교류의 접점에 있던 집단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바둑은 단순 오락으로 유입되기보다, 교양과 지식의 일부로 받아들여질 때 ‘생존’ 가능성이 커집니다. 초기 수용층이 상층에 집중될수록 바둑은 빠르게 권위를 얻고, 정교한 규칙과 기록 문화로 발전할 기반을 확보합니다.
또한 일본에서 바둑이 자리 잡는 과정에는 “경쟁과 명예”의 구조가 강하게 작동합니다. 상층 사회에서 바둑 실력은 개인의 기량을 드러내는 명확한 지표가 될 수 있고, 이는 후원과 제도화를 촉진하는 동력이 됩니다.
가문·기관 중심의 체계가 기원 서사를 강화한 방식
제도화는 기원을 필요로 합니다. 가문이나 기관이 바둑을 관리하고 권위를 부여하려면, 바둑이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정통’의 계보를 가진 기술이어야 합니다. 이때 기원 서사는 단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정통성을 입증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배웠는가”, “어떤 계통이 진짜인가”, “어떤 규칙과 해석이 정통인가” 같은 질문이 제도화 과정에서 더욱 중요해지고, 그 결과 기원 담론은 더 체계적으로 정리되거나 특정 계보 중심으로 재배열될 수 있습니다.
즉 일본의 제도화는 바둑의 실력 체계를 정교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바둑이 어디서 왔고 어떤 전통을 이어왔는지에 대한 서사까지 ‘관리 가능한 형태’로 굳히는 역할을 했습니다. 기원은 단순한 역사 정보가 아니라, 제도의 정당성을 받쳐주는 근거가 되는 셈입니다.
규칙·용어가 정리되며 생긴 차이점
제도는 규칙을 선명하게 만들고, 선명한 규칙은 지역 차이를 부각합니다. 일본에서 바둑이 체계화되면서, 용어의 정리 방식이나 대국 운영 관행이 다른 지역과 미묘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핵심 원리를 바꾼다기보다, 같은 원리를 ‘표현하고 운영하는 관습’이 달라진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특정 상황의 처리 방식이 세부 규정으로 명문화되면, 기존의 관습적 처리와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또한 기록 문화가 강화될수록, 용어는 더 정밀해지고, 해석의 표준이 더 강하게 고정됩니다. 이 과정에서 바둑은 “누가 두어도 같은 규칙”을 넘어 “어떤 공동체의 규칙 체계”라는 성격을 띠게 되며, 지역별 전통의 차이가 남는 토대가 됩니다.
전파 과정에서 생긴 공통분모와 변형
동아시아로의 전파는 바둑을 분화시키는 동시에, 바둑을 하나의 공통 문화로 묶어냈습니다. 돌을 두어 연결과 포위를 만들고, 살아남은 돌과 확보한 집을 통해 승부를 가른다는 핵심 원리는 공유됩니다. 반면 기물 제작, 제도, 기록 방식, 용어 선택, 대국 문화는 각 지역의 환경에 따라 변주됩니다. 이 공통과 변형의 결합이 바둑을 오랫동안 지속시키는 힘이 되었습니다.
동일한 핵심 원리와 지역적 변주
바둑의 핵심 원리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돌은 교차점에 놓이고, 포위되면 잡히며, 궁극적으로 집과 생사 판정이 승부를 결정합니다. 이 원리가 유지되는 한, 바둑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게임”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다만 지역적 변주는 보통 운영 방식에서 나타납니다. 어떤 곳은 공격적 전투를 강조하는 문화가 생기고, 어떤 곳은 형세 운영과 안정 지향의 해석이 우세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변주는 규칙보다 스타일과 교육 체계, 기보 분석 전통, 고수들의 유행에 의해 강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지역적 변주는 바둑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같은 뼈대 위에 서로 다른 해석과 미학을 쌓아 올린 결과로 보는 편이 타당합니다.
돌·판 제작 문화의 확산과 표준화
전파는 기물 문화의 전파이기도 합니다. 바둑판과 바둑돌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야 바둑은 생활 속 취미로 정착할 수 있습니다. 초기에는 지역 자원에 맞춘 재료가 사용되고 형태가 다양했을 수 있지만, 바둑이 상층 문화로 자리 잡고 대국이 늘어나면 기물의 품질과 규격이 중요해집니다. 이때 판의 크기, 선의 간격, 돌의 크기와 무게감 같은 요소가 점차 표준화되며, 바둑은 “어디서나 비슷한 감각으로 둘 수 있는 게임”이 됩니다.
또한 제작 문화가 발달하면 바둑은 단순 놀이를 넘어 소유와 취향의 대상으로도 확장됩니다. 고급 판과 돌은 상징 자본이 되며, 바둑의 권위를 다시 끌어올립니다. 이런 순환 구조는 바둑이 장기간 안정적으로 전승되는 데 유리하게 작동합니다.
전승(구전·문헌·기보)이 기원 인식을 바꾼 지점
바둑의 기원 인식은 ‘무엇이 실제로 있었는가’만으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기록되고, 어떻게 전달되었는가가 기원을 재구성합니다. 구전은 신화와 상징을 확대하기 쉽고, 문헌은 권위를 부여하지만 해석의 층위를 만들며, 기보는 승부의 사례를 누적해 “정통”과 “전통”을 구체화합니다. 특히 기보가 축적되면, 바둑의 중심은 ‘창시 전설’에서 ‘대국의 계보’로 이동합니다. 사람들은 “바둑이 언제 생겼는가”보다 “어떤 고수가 어떤 방식으로 두었는가”를 통해 바둑의 권위를 체감하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기원 서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지만, 기능이 바뀝니다. 전설은 문화의 뿌리를 설명하는 상징으로 남고, 실제 바둑의 권위는 기록된 대국과 제도, 교육 체계, 기물 문화가 만들어내는 현실적 전통 위에서 강화됩니다. 동아시아로의 전파는 바로 이 변화를 촉진한 과정이었고, 바둑을 “전설에서 출발해 기록과 제도로 굳어진 문화”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결정적 단계였습니다.
결론
바둑의 기원은 하나의 “창시 순간”으로 고정되기보다, 의미를 부여하는 전설·상징의 층과 근거를 남기는 문헌·유물의 층이 겹치며 형성된 문화사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요·순 임금 설화는 바둑을 교화·수양의 도구로 격상시키고, 천문·우주관과 군사 비유는 바둑판과 대국을 세계관·전략의 언어로 확장해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동시에 고대 중국의 기록과 유물은 규격과 규칙이 단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가 공존하다가 19×19, 집·사석·활로, 용어와 기보를 중심으로 표준 체계가 정리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후 한반도에서는 궁중·사대부 문화 속 교양의 취미로 토착화되었고, 일본에서는 가문·기관 중심의 제도화가 전문성과 정통 서사를 강화하며 전승 구조를 견고히 했습니다.
FAQ
바둑의 “진짜 기원”은 전설이 맞나요, 문헌이 맞나요?
전설은 “왜 바둑이 가치 있는가”를 설명하는 문화적 장치에 가깝고, 문헌·유물은 “어떤 형태로 존재했는가”를 좁혀주는 근거입니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대체하기보다, 전설이 상징과 권위를 만들고 문헌·유물이 형성 과정을 현실적으로 보완하는 관계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요·순 임금 전설은 왜 그렇게 널리 퍼졌나요?
군주가 교화 목적에 활용했다는 서사는 바둑을 단순 오락이 아니라 절제·판단·인내를 가르치는 수양 도구로 격상시킵니다. 이런 틀은 바둑을 상층 문화로 정당화하고, “품격 있는 취미”라는 사회적 위상을 강화하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바둑판을 우주나 별자리로 해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격자와 교차점은 질서·배치·균형을 상징하기 좋고, 흑백 대비는 음양·대립과 조화를 설명하는 강력한 언어가 됩니다. 이러한 해석은 바둑의 규칙을 증명하기보다는, 바둑을 철학적 사유의 도구로 읽게 하며 문화적 권위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19×19는 처음부터 표준이었나요?
그렇지 않다고 보는 해석이 더 합리적입니다. 초기에는 다양한 격자와 판 문화가 공존했을 가능성이 크고, 시간이 흐르며 교육·교류·기록이 가능한 공통 규격으로 수렴하면서 19×19가 “표준”의 지위를 갖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9×9나 13×13은 왜 지금도 쓰이나요?
작은 판은 전투와 생사 형태가 빠르게 나타나 기본기를 반복 학습하기에 유리합니다. 또한 시간 제약이 있는 대국이나 훈련 환경에서 실용적이어서, 19×19의 축소판이자 교육·연습 체계로 기능합니다.
“집(地)” 개념이 정착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승부를 단순히 돌을 많이 잡는 것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돌과 형성된 영역을 기준으로 점수화해 승패를 가르는 체계가 확립되었다는 뜻입니다. 집이 계량화되면 끝내기, 형세 판단, 미세한 이득의 축적이 전략의 핵심으로 부상합니다.
활로·사석 같은 개념은 왜 그렇게 중요해졌나요?
영역을 계산하려면 무엇이 살아 있고 죽었는지(사석), 어떤 조건에서 죽는지(활로·포위)를 공통 기준으로 합의해야 합니다. 이 체계가 정리될수록 바둑은 감각 게임이 아니라, 형태와 논리가 축적되는 연구·교육 가능한 게임으로 발전합니다.
지역·시대별 규칙 차이가 있었다면 “같은 바둑”이 아니었던 건가요?
핵심 원리(착점, 포위, 생사, 집의 형성)는 공유되었지만, 세부 운영(계산 방식, 사석 처리, 반복 규정 등)에 관습 차이가 남았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교류와 공식 대국이 늘어날수록 이런 차이를 조정하려는 압력이 커지며 표준 규칙의 권위가 강화됩니다.
한반도에서는 바둑이 어떻게 토착화되었나요?
궁중과 사대부 사회에서 바둑은 교양과 수양의 언어로 받아들여지며 “품격 있는 여가”로 자리 잡기 쉬웠습니다. 대국은 친목과 담론의 장이 되었고, 실력의 위계가 형성되면서 전승 기반이 안정적으로 구축되었습니다.
일본의 제도화는 바둑의 “기원 인식”에 어떤 영향을 줬나요?
가문·기관 중심의 체계가 강해지면 정통성과 계보가 중요해지고, 기원 서사는 제도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기능합니다. 이 과정에서 규칙·용어·기록이 더 명문화되고, 기보 축적을 통해 전설 중심의 권위가 “대국과 전승 구조” 중심으로 재편되는 경향이 강화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