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과 백 단순한 색이 아님
바둑판을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선명한 흑과 백의 대비입니다. 얼핏 보기엔 그저 색깔의 차이처럼 보일 수 있지만, 동양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대비는 단순한 구분이 아니라 우주적 이치인 ‘음양(陰陽)’의 상징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흑이 음(陰)이고, 백이 양(陽)이라 할 수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이분법이 아닙니다. 음과 양은 서로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시간과 상황에 따라 계속해서 움직이고 전환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로 이 유동성과 상호작용의 개념이 바둑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음양은 유동적인 힘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음양은 절대적인 선과 악, 강함과 약함이 아닙니다. 음은 때론 양으로 바뀌고, 양은 다시 음으로 전환됩니다. 예를 들어 밤은 음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낮(양)으로 전환되고, 낮도 결국 다시 밤으로 돌아옵니다. 이 순환은 자연의 질서이며, 이 흐름 속에서 조화를 찾는 것이 바로 ‘도(道)’입니다.
바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반에 불리했던 돌이 중반 이후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며 형세를 뒤집기도 하고, 유리해 보였던 진영이 상대의 한 수로 무너지는 일도 흔합니다. 이처럼 국면은 늘 변화하며, 승부의 중심축은 계속해서 흔들립니다.
형세 판단은 곧 음양의 감각
바둑에서는 “형세 판단”이란 말이 자주 쓰입니다. 지금 이 국면에서 내가 유리한가, 아니면 수세에 몰렸는가? 실리를 취할지, 세력을 쌓을지, 공격을 감행할지, 수비로 돌아설지 — 이런 선택의 순간들이 반복되며 한 판의 승부가 만들어집니다.
이는 마치 음양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전환을 통해 균형을 유지하려는 움직임과도 같습니다. 공격(양)이 지나치면 허점이 되고, 수비(음)에만 치우치면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결국 지혜로운 바둑은 음양의 균형을 감각적으로 읽어내는 자가 두는 바둑입니다.
흑백의 전환, 그리고 조화의 미학
한 수 한 수를 두면서 바둑판 위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혼돈 속에서 조화를 찾아가는 동양적 세계관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때 흑과 백은 결코 서로를 소멸시키려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가 있어야만 완전한 그림이 완성됩니다. 이는 곧 음양이 서로를 돕고, 견제하며, 함께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는 철학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래서 바둑은 단순한 승부의 놀이가 아니라, 상대와 나, 공격과 수비, 실리와 세력 사이의 균형을 찾아가는 수양의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